영화 엽기적인 그녀 리뷰,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
지난 포스팅에서 코미디 영화를 다뤘다 보니 갑자기 다른 코미디 영화들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한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영화가 바로 엽기적인 그녀였습니다. 지금 OTT에서는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볼 수 있더라고요.
엽기적인 그녀는 우리나라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의미 없는 대사, 재미없는 대사 하나 없이 알찬,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달달하고 간지럽고 안타깝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영화. 이 영화 말고 로맨틱 코미디 좋았던 게 있나 생각하면 저는 지금 생각나는 게 별로 없네요. 엽기적인 그녀를 좀 전에 다시 봐서 이 영화가 주는 인상이 너무 세서 다른 게 순간 잘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실제로 이보다 괜찮은 로맨틱 코미디 작품이 없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소개
2001년 7월 27일에 개봉한 곽재용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전지현, 차태현 주연이고, 러닝타임 122분입니다. 원작은 견우74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이 1999년에 PC통신 나우누리 유머란에 연재됐던 인터넷 소설인데요. 이 인터넷 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그 책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네이버 같은 데 올라갔던 웹소설이 드라마화되는 것과 비슷한 건데, 2001년, PC통신 시절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거의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동시대에 유명했던 인터넷 소설 작가 '귀여니'의 소설들이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최종 관객 수 약 488만 명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2001년은 아직 천만 영화가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제작비와 마케팅비가 지금보다 훨씬 적게 들던 시절이라 488만의 순수익은 지금의 천만 관객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2001년 흥행 3위(친구, 조폭 마누라에 이어)였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는 한동안 부동의 1위를 유지했습니다. 전지현은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대단했는데요. 중국, 대만, 홍콩,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전역에서 히트했고, 8개국에서 리메이크되었습니다. 일본 아카데미상 외국 영화 부문 후보에 오른 건 기생충 이전까지 한국 영화로는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IMDb 평점 8.2, 로튼토마토 관객 점수 93%로 해외에서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줄거리 (스포 있음)
공대생 견우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여자를 만납니다. 이 여자가 옆에 있던 노인의 머리 위에 토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야"라고 부르면서 쓰러집니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전부 견우를 그녀의 남자친구라고 생각하고, 견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여자를 떠안게 됩니다.
이게 시작입니다. 그녀는 이름이 안 나옵니다. 영화 내내 그냥 "그녀"입니다. 그리고 이 그녀가 진짜 엽기적입니다. 견우를 만나면 술을 먹이고, 때리고, 하인 부리듯 시키고, 갑자기 울고, 갑자기 화내고, 이유 없이 사라집니다. 견우는 이 여자한테 끌려다니면서 온갖 사고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견우는 이 여자를 점점 좋아하게 됩니다. 겉은 거칠지만 알고 보면 여리고 따뜻한 면이 있는 여자. 웃을 때의 표정, 갑자기 진지해질 때의 눈빛. 영화를 보면서 관객도 견우와 같이 그녀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전 남자친구가 죽었다는 것. 그녀의 거친 행동들은 사실 그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가 견우를 불러서 딸을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둘은 헤어집니다. 헤어지기 전에 둘은 타임캡슐을 묻습니다. 나무 아래에. 2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2년이 흐르고, 둘은 각자의 삶을 삽니다. 그녀는 소개팅을 합니다. 그 소개팅 자리에서 견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 그녀의 소개팅남은 견우의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견우의 사촌이었고, 그녀의 죽은 전 남자친구도 견우의 사촌이었습니다. 고모가 아들을 잃고 견우에게 "아들이랑 너무 닮았다"고 했던 것, 그녀가 처음 만난 날 "자기야"라고 불렀던 것. 모든 복선이 이 한 순간에 연결됩니다.
잊을 수 없는 대사들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나 봐." 아직까지도 회자를 넘어서 예능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대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견우가 그녀의 소개팅남에게 그녀에 대해 알려주는 장면. "술은 절대로 세 잔 이상 먹이면 안 되고요, 아무나 패거든요."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의 연출이 정말 좋았습니다. 임호가 소개팅 자리에서 "그 사람이 알려줬다"며 읊어주다가 카메라가 전환되면서 차태현이 임호에게 말해주는 장면으로 바뀌는 그 전환. 시간과 공간이 겹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이 영화에는 이런 좋은 대사가 정말 많습니다. 코미디 영화라고 해서 마냥 웃긴 게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인스턴트 사랑이 많고, 빠르게 만나고 헤어지고, 많은 정을 안 주는 요즘 세대들의 사랑법이 꼭 틀렸다고 볼 수는 없고 시대에 따른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와 같은 사랑이 진짜 순수하고 멋진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도 매력적인 전지현의 캐릭터
전지현이 정말정말 이쁘고, 너무 매혹적으로 나옵니다. 겉은 거칠지만 알고 보면 여리고 따뜻한 면이 있는 여자. 무엇보다 그런 여자가 전지현이기에 이 여자한테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전지현의 실제 성격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연기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알고 보니 실제로 전지현이 이런 푼수 같고 웃긴 느낌도 있긴 하더라고요. 영화에서처럼 거칠지는 않지만요. 그래서 이 캐릭터가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낸 문화적 영향이 상당합니다. 당시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렇게 남자를 쥐락펴락하고, 가지고 놀고, 어떨 때는 하인 부리듯이 하는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었습니다. 엽기적인 그녀가 흥행하고, 전지현이 이 역할을 정말 매력적으로 잘 소화했기에 이후에도 당당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심지어 이때 전지현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런 을 같은 사랑을 꿈꾸는 남자들도 많았다죠.
2000년대 초반의 시대가 담긴 영화
이 영화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엽기"라는 말도 그때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말이었고, 타임캡슐도 연인들끼리 많이 하던 문화였죠. 당찬 여성들이 점점 많이 등장하고 커리어우먼이 대두되던 때가 딱 이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원작부터가 시대의 산물입니다. PC통신 나우누리에서 연재된 인터넷 소설이 화제가 되어 책으로 나오고,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엽기적인 그녀는 그 흐름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웹소설이나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흐름인데, 25년 전에 이미 그런 모델이 있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2001년에 본 사람들은 그때의 추억과 함께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고, 지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 그때 이런 분위기였구나"를 느끼면서 보실 겁니다. 어느 쪽이든 재밌습니다. 좋은 로맨틱 코미디는 시대를 타지 않으니까요.
또한 너무 매력적인 차태현
전지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솔직히 차태현의 역할이 없으면 이 영화는 성립이 안 됩니다. 견우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끌려다니면서도, 맞으면서도, 창피당하면서도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역할을 차태현만큼이나 또 자연스럽게 잘 소화할 캐릭터가 있을까요?
차태현은 당하면서도 귀엽고, 순해 보이면서도 진심이 느껴지고, 바보 같으면서도 따뜻하죠. 이 사람이 아니면 견우가 이렇게 사랑받는 캐릭터가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차태현 본인도 이 영화 이후 "견우 같은 캐릭터만 들어온다"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역할이 강렬했다는 뜻이겠죠. 전지현이나 차태현이나 본인 옷에 맞는, 본인 얼굴과 느낌과 보여지는 성격에 딱 맞는 캐릭터를 만나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배우가 들어왔다면 이 정도로 흥행하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다시 봐도 정말정말 재밌는 작품입니다. 코미디 영화라서 웃긴 건 당연한 건데, 배꼽 빠지게 웃기기보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배꼽 빠지게 웃겼던 장면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기분 좋게, 유쾌하게 웃기고, 무엇보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의 영화입니다. 지금 글 쓰면서도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네요. 그 장면들을 생각하면서 쓰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너무도 재밌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화, 안 보신 분들 꼭 한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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