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볼 때마다 재밌는 사극 영화 Goat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니 또 다른 사극 영화인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생각이 나더군요. 이 영화도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더해 만든 영화죠. 승정원일기에서 지워진 15일간의 기록, 그 빈 시간에 광해군 대신 다른 사람이 조선을 다스렸다면? 이 한 문장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광해는 제 인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입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로 다섯 번은 넘게 봤고, 볼 때마다 재밌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전개,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 군더더기 없는 웃음 포인트. 특히 웃음 포인트가 진짜 배꼽이 찢어질 정도로 웃긴 장면이 몇 개 있습니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언제나 재밌는 영화는 세상에 흔치 않은데, 광해는 그런 영화입니다.
왕과 사는 남자가 1500만을 넘기면서 사극 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지금, 아직 광해를 안 보신 분이라면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다시 한 번 보셔도 연기나 숨은 디테일들도 더 잘 보이고 재미있으실 겁니다.
영화 소개
2012년 9월에 개봉한, 추창민 감독이 연출을 맡은 사극 영화입니다. 이병헌이 광해군과 만담꾼 하선을 1인 2역으로 연기하고, 류승룡이 도승지 허균, 한효주가 중전 역을 맡았습니다. 131분짜리로, 2시간이 넘어가는 영화임에도 지루한 부분없이 박진감 넘치게 흘러가기 때문에 길게 안 느껴집니다. 오히려 끝나고 나면 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드문 영화입니다.
1,232만 관객이 들었습니다. 같은 해에 영화 '도둑들'이 1,300만을 찍어서 2012년 영화 관객 동원 1위는 놓쳤지만, 2012년은 한국 영화 역사에서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미친 해였습니다. '광해'는 특히 최초로 사극으로 천만을 넘겨서 더 미쳤다는 말이 나왔었죠. 백상예술대상 작품상·감독상,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까지 싹쓸이를 했습니다. 그만큼 작품성도 있다는 얘기겠죠. 근데 사실 대중들은 작품성 이런 거 대부분은 잘 모르잖아요. 그냥 재밌는 게 최고잖아요. 그냥 진짜 재밌습니다. 볼 때마다 재밌습니다. 상 받은 영화 중에도 두 번째 볼 때부터는 지루한 영화가 은근 많은데, 광해는 아닙니다. 다섯 번, 열 번 봐도 이병헌의 개그 등에서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또 순식간에 바뀌어 살벌한 광해군을 연기할 때는 또 심장이 쫄깃합니다.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배경은 광해군 8년입니다. 당쟁이 극에 달한 시기이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궁 안에도 있습니다. 광해군은 점점 예민해지고 난폭해집니다. 사람을 못 믿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광해군은 도승지 허균에게 명합니다. 자기 대신 위험에 노출될 대역을 구해 오라고.
허균이 데려온 사람이 하선입니다. 기방에서 만담으로 먹고사는 천민인데, 문제는 이 사람이 왕과 얼굴이 똑같다는 겁니다. 재주도 좋고 말솜씨도 있어서 왕 흉내를 기가 막히게 냅니다. 처음에는 하룻밤만 대역을 서는 거였습니다.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잠깐 앉아 있는 것. 그런데 상황이 틀어집니다.
광해군이 독에 당해 쓰러집니다. 의식을 잃은 겁니다. 허균은 왕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계속 왕 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하룻밤이 아니라 보름 가까이. 만담꾼이 진짜로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겁니다.
여기서부터가 이 영화의 진짜 재미입니다. 하선은 허균한테 말투, 걸음걸이, 국정을 다스리는 법을 하나씩 배워갑니다. 들키면 죽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하선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진짜 광해는 난폭하고 예민했습니다. 그런데 가짜 광해는 따뜻하고 백성을 걱정합니다. 대동법을 추진하고,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거부합니다. 궁 안의 사람들이 느낍니다. 왕이 달라졌다. 중전도 느끼고, 내관도 느끼고, 대신들도 느낍니다. 이 긴장감이 영화 내내 지속됩니다. 들킬까 안 들킬까, 이 사람이 진짜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결국 하선이 가짜라는 걸 눈치챈 세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왕의 가슴에 있어야 할 칼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려는 순간, 의식을 회복한 진짜 광해군이 돌아옵니다. 광해군은 승정원일기에 적힌 하선의 행적을 봅니다. 자기가 못 했던 것들을, 자기 대신 천민이 해냈다는 걸 읽습니다. 그 순간 광해군의 표정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하선은 궁에서 나갑니다.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15일 동안 조선에는 왕보다 더 왕다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여운이,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에도 남습니다.
이병헌의 1인 2역이 왜 대단한가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병헌의 연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1인 2역 연기 중 하나로 꼽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두 명을 연기한 게 아닙니다. 광해군, 하선, 그리고 광해군인 척 연기하는 하선. 사실상 1인 3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거죠. 광해군은 무겁고 날카롭고 살벌합니다. 하선은 가볍고 익살스럽고 따뜻합니다. 그리고 광해군을 흉내 내는 하선은 서툴면서도 점점 진짜 왕의 품격을 갖춰가는, 변화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더 놀랍습니다. 특히나 광해군과 하선은 진짜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특수분장 등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볼 때는 큰 차이가 없는데 표정과 분위기로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지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래서 더 대단하다 느껴지고, 그래서 더 이 영화가 재밌게 다가옵니다. 사생활 논란이 있었음에도 이병헌이 다시 계속 연기 활동을 하고, 인기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캐릭터마다 그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녹여내는 독보적인 연기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찾아보니 특수분장이 들어가긴 했다고 하네요. 진짜 광해군은 눈 밑에 살벌한 느낌의 주름이 있고, 하선은 눈 밑이 깨끗합니다. 이 미세한 차이로 두 사람이 더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졌나 봅니다.
참고로, 영화'왕과사는남자'에서 한명회 역의 유지태도 평소보다 인상이 세보이고 더 무섭게 느껴졌는데, 눈 위쪽에 테이프를 붙여 눈 끝이 올라가게 분장을 했다고 합니다. 역시 영화에서 분장의 힘도 대단한 것 같네요.
류승룡의 허균이 이 영화의 뼈대입니다
이병헌의 연기가 압도적이라서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되지만, 류승룡이 연기한 도승지 허균 캐릭터 또한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허균은 하선을 왕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들키면 죽는 사람입니다. 하선이 엉뚱한 짓을 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점점 하선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 이 변화를 류승룡이 정말 세밀하게 연기합니다. 처음에는 하선을 도구로만 보던 사람이, 나중에는 하선이 보여주는 왕의 모습에 감화되어 진심으로 그를 보필하게 됩니다.
류승룡과 이병헌의 호흡이 이 영화의 웃음과 감동을 둘 다 만들어냅니다. 특히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이 진짜 웃깁니다. 제가 아까 배꼽이 찢어질 정도라고 했는데, 그 웃음의 상당 부분이 이 두 배우의 케미에서 나옵니다. 하선이 왕 노릇을 하면서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고, 허균이 뒤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장면들. 몇 번을 봐도 웃음이 나옵니다.
웃기고 울리고 하지만 신파는 아닙니다
한국 영화에서 "웃기다가 울리는" 공식은 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후반부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왕과사는남자'도 약간 그랬습니다.
'광해'가 다른 점은, 웃음과 감동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억지스럽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각본이 훌륭한 것도 있고, 연기를 너무 잘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습니다. 훌륭한 작품이 훌륭한 배우와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던지는 메세지 또한 정확하기에 더욱이나 신파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선이 웃기는 이유가, 동시에 하선이 슬픈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민이 왕 흉내를 내면서 자기가 살면서 겪지 못했던 당황스러운 상황에 봉착하고 겪어내는 과정이 웃깁니다. 그런데 그 천민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진짜 왕보다 백성을 더 걱정하니까 멋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슬픕니다. 진짜 왕이 왕다운 것을 못 하고, 가짜 왕이 진짜 왕다운 큰 사람의 면모를 보여주니까요. 이 아이러니가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리고 메세지를 던지죠. '이런 사람이 왕이어야 한다.'
특히 마지막에 하선이 궁에서 나와야 하는 장면. 15일 동안 왕이었던 사람이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가는 순간. 이 장면에서 눈물이 나는 건 신파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우리도 그 속에 동화되어 아쉽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뻔한 흐름일 수 있는데 그런 뻔한 흐름 속에서 감정을 복받치게 하고 눈물도 나오지만 흔하게 느껴지지 않고, 신파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진짜 좋은 영화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승정원일기에서 지워진 15일
이 영화의 발상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광해군 시절의 일부 기록이 빠져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기록이 유실된 것으로 보겠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만약 그 15일 동안 다른 사람이 왕이었다면?"이라는 상상을 얹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엄흥도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인물의 빈칸을 상상으로 채운 것처럼, 광해도 역사 기록의 빈칸을 상상으로 채운 영화입니다. 둘 다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더해 만든 팩션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광해 쪽이 그 상상력의 밀도와 완성도에서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발상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1993년 케빈 클라인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데이브와 전개가 유사하다는 표절 논란이 있었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와도 비교가 되었습니다. 다만 표절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비슷한 설정을 한국 사극으로 가져와서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와 비교하면
두 영화를 놓고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둘 다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더한 사극이고, 둘 다 천만 관객을 넘겼고, 둘 다 초반에 웃기다가 후반에 울리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저는 광해가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더 높다고 느꼈습니다. 광해는 대사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웃음 포인트가 억지스럽지 않고, 감동이 자연스럽게 쌓입니다. ('왕과사는남자'는 여기서 웃기고 싶은데? 하는 감독과 작가의 생각이 보이는 구간이 몇 있었습니다. ) 배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김인권, 장광. 이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정말 대단합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솔직하게 썼습니다만, 광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재밌는 영화. 한국 사극 영화의 정점. 아직 안 보셨다면 꼭 한 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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