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아직까지도 아련한 장면들이 넘치는 작품
하도 영화가 많이 나오고, 좋은 작품들이 많다보니 인생 영화를 하나로 꼽기는 힘들죠. 시간이 지나면 조금 잊히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동안 제 인생 영화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잘 안 나왔었는데요. 나중에 생각나면 '아 왜 이 작품을 잊고 있었을까..' 후회할 정도로 제게 정말 깊은 인상을 남긴, 인생영화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영화의 장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 하고, 아련해지고, 슬퍼지는 그런 영화인데요. 좋은 영화의 힘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감정의 선이라는 게, 그때 당시에는 너무 재밌게 봤어도 다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진부해져서 '굳이?', '굳이 또 봐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좋은 영화들은 언제나 또 보고싶죠. 연기는 물론 연출도 너무 대단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인생작이라고 꼽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다뤘고, 지금은 연기 대가들이 된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도 한 몫 하긴 할 겁니다.
영화 소개
2000년 9월 9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볼 때는 몰랐는데, 아니 보고나서 한참 지나서까지도 몰랐는데, 알고보니 원작 소설이 따로 있더라고요. 원작은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입니다. 연기 대부가 된 송강호, 이병헌, 그리고 이영애, 김태우, 신하균이 출연합니다. 지금 보면 캐스팅이 미쳤죠? 송강호와 이병헌이 함께라니..거기에 신하균, 절정의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이영애에,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역시나 미치도록 연기 잘하는 김태우까지.. 이 다섯 사람이 한 영화에 다 나옵니다. 2000년이라 가능했던 일이겠죠. 물론 이때도 하나같이 연기 잘하던 배우들이지만 지금의 인지도와 인기는 아니었으니까요.
관객 약 580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하도 천만영화가 많이 나오다 보니 '생각보다 못하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기준으로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었습니다. 그 전 기록이 '쉬리'였는데, 쉬리를 넘어선 겁니다. 9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습니다. (쓰면서 보니 쉬리를 안 다뤘었네요. 다시 한번 보고 리뷰 써보겠습니다. 역시 너무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받았고,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선정 한국 영화 100선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을 살린 작품입니다. 이전 두 작품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해서 감독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는데, JSA의 성공으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습니다. 박찬욱 감독 본인도 25주년 GV에서 "이 작품이 날 살려줬다"고 말했습니다. 송강호에게는 국민 배우로 올라서는 발판이 되었고, 이병헌에게는 첫 흥행 배우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영화계의 대부들이 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품이기에 지금 더욱 매력이 느껴지네요.
줄거리 (스포 있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 초소에서 총성이 울립니다. 북한 군인 정우진(신하균)이 총에 맞아 죽고, 남한 군인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부상을 입고 남쪽으로 도주합니다. 남한은 북한의 납치 시도라고 주장하고, 북한은 남한의 기습 테러라고 주장합니다. 양측의 주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 남북은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조사를 맡기기로 합의합니다.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장 소령(이영애)이 파견됩니다. 소피는 남한의 이수혁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각각 조사하지만, 두 사람의 진술이 완전히 엇갈립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소피가 조사를 진행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수혁이 비무장지대 수색 중 지뢰를 밟아 위험에 처했을 때, 오경필과 정우진이 그를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수혁은 밤에 몰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초소를 방문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이수혁 혼자였지만, 나중에는 동료 남성식(김태우)도 함께 갑니다.
네 명의 남북한 군인이 적의 초소에서 함께 어울립니다.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사진을 보여주고, 농담을 하고, 형 동생 하며 지냅니다. 분단이 만들어놓은 선을 넘어서 친구가 된 겁니다. 이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잔인한 복선입니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 우정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걸.
어느 날 밤, 네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북한군 장교에게 발각됩니다. 총을 든 장교가 들이닥치고, 순간적으로 총격이 벌어집니다. 정우진이 죽고, 장교도 죽습니다. 오경필은 살아남고, 이수혁은 부상을 입습니다. 친구끼리 총을 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네 사람의 우정이 만들어낸 비극이었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소피는 결국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못한 채 떠나게 됩니다. 이수혁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오경필뿐입니다.
이 영화가 남북 영화와 다른 점
한국 영화에서 남북 관계를 다룬 작품은 꽤 많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쉬리도 있고요, 의형제, 공조, 강철비. 그런데 대부분은 결말이 희망적입니다. 희망을 보여주며 끝납니다. 주인공이 죽더라도 더 큰 비극을 막았다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다음이 있죠.
JSA는 다릅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실은 묻히고, 친구는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분단이라는 시스템 앞에서 개인의 우정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무겁고 더 현실적입니다. 어찌 보면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남북 소재 영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닙니다. 어느 쪽 편도 안 듭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그 감정이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 사이의 비극을 그릴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하죠. 이게 박찬욱 감독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희망을 그려야 미래도 희망적이고, 혹은 희망적인 미래를 추구하고 하지는 않죠. 절망과 비극을 그려도 오히려 더 희망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너무 무거운 현실을 다루는 그 책임감과 버거움, 눈치, 다 충분히 이해되지만 억지로 희망적인 내용을 껴넣기 위해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더 좋은 스토리가 있고, 더 좋은 연출이 있는데 굳이 꼭 희망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과 의무감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서요.
송강호의 오경필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북한군 오경필 중사를 연기합니다. 탈북민들이 이 영화를 보고 "송강호가 진짜 북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평양 말씨의 특징을 정확하게 살렸다고 합니다. 사투리 연기가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고.
오경필이 좋은 캐릭터인 이유는, 이 사람이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수혁이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라면, 오경필은 현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남한 군인과 친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인간적인 정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이 모순을 송강호가 표정 하나하나에 담아냅니다. 웃고 있는데 어딘가 불안한 눈빛. 형이라고 불리면서도 이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의 표정. 이게 연기가 됩니다.
송강호는 이 영화 이후 살인의 추억, 괴물, 기생충까지 이어지는 커리어를 쌓았는데, JSA가 그 출발점이었다는 걸 다시 보면서 느꼈습니다. 25주년 GV에서 송강호가 처음에 출연을 거절했다가 박찬욱 감독을 만나고 "품격에 압도돼 수락했다"고 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병헌의 이수혁
이병헌이 연기한 이수혁 병장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입니다. 북한 군인에게 목숨을 구해진 은혜를 갚고 싶어 군사분계선을 넘는 사람.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그 순수함이 결국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이수혁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결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입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상황. 이 모든 것이 이수혁을 무너뜨립니다. 이병헌이 이 감정의 붕괴를 정말 잘 보여줍니다. 특히 영화 초반에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장면. 아직 과거가 공개되기 전인데, 그 눈빛만으로 이 사람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이병헌은 25주년 GV에서 "개봉 때 몰래 영화관에 가서 40번쯤 봤다"고 했습니다. 첫 흥행작이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작품이니까 그만큼 애착이 컸을 겁니다. 이후 이병헌이 광해에서 보여준 1인 2역 연기나 할리우드 진출까지, 그 커리어의 시작점에 JSA가 있습니다.
2000년에 이 영화가 나왔다는 것의 의미
2000년은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던 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났고,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남북 관계에 희망이 있던 시기입니다. 이 영화가 그 분위기 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희망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단이 개인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줍니다. 남북이 화해 무드에 있을 때 나온 영화가 "화해해도 이건 안 바뀐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그때의 희망이 어떻게 됐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 영화가 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재밌는 건 김정일도 이 영화를 좋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냉전 체제를 비판하는 영화를 냉전 체제의 당사자가 좋아했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김정일이 엄청난 영화광이었고 이영애의 팬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사진에 대해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미국인 관광객이 공동경비구역에서 찍은 단체 사진. 그 프레임 안에 네 명의 군인이 우연히 함께 찍혀 있습니다. 서로 모르는 척 서 있지만, 관객은 이 네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대단한 이유는, 이것이 네 사람이 친구였다는 유일한 물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수사 기록에도 없습니다. 네 사람의 우정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사진 한 장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영화 전체를 요약합니다. 분단은 사람을 갈라놓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갈라놓지는 못한다는 것. 그런데 결국 마음이 통해도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으면 비극이 된다는 것.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을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엔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대사 없이, 음악과 사진 한 장으로 관객의 가슴을 후벼파는 엔딩.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박찬욱입니다.
제가 리뷰를 쓰는 작품들은 다 한번씩 보시기를 추천드리는 영화들이지만, 이거는 정말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슬프고 비극적이고, 많은 감정들이 오가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거든요. 김광석의 노래가 OST로 삽입되었는데, 김광석의 목소리가 더욱 구슬프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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