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리뷰, 1500만 관객 영화를 늦게 보고 온 솔직한 감상
어제 봤습니다. 개봉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시점에, 평일 낮에, 극장에 관객 6명인 상태로. 천만을 훌쩍 넘어 1500만을 넘었다고 하니까 저만 안 본 것 같아서, 아직 영화관에서 상영할 때 가서 보자 해서 갔는데, 솔직히 말하면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재밌게 본 부분이 분명 있었습니다. 졸작이라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500만이라는 숫자에 걸맞은 영화인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좀 물음표가 붙습니다. 천만 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으니까 더 보고 싶어지고, 더 바이럴이 되고, 그래서 1500만까지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감상입니다. 주변에 재밌게 봤다는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분들의 감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좀 달랐다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기본 정보
왕과 사는 남자는 2026년 지난달 2월 4일에 개봉한 사극 영화입니다.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 작품이고요.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안재홍 등이 출연합니다. 제작비 약 100억 원, 러닝타임은 약 130분입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된 어린 단종(박지훈)과,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광천골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봉 후 입소문을 타며 역주행에 성공해서, 3월 6일에 천만 관객을 달성했고, 3월 25일에 1500만을 돌파하며 역대 관객수 3위, 매출 1위를 기록했습니다. 명량, 극한직업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1500만을 넘긴 영화입니다.
조금 유치한 느낌의 대사들?
가장 먼저 걸렸던 건 대사입니다. 웃기려고 넣은 대사들이 있는데, 막 빵 터지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극장에 6명밖에 없었으니까 분위기 탓이 클 수도 있습니다. 천만 관객이 몰렸을 때 꽉 찬 극장에서 다 같이 웃으면서 봤으면 느낌이 완전히 달랐겠죠. 코미디 영화는 분위기를 타는 장르니까요.
그래도 객관적으로 대사만 놓고 보면, 좀 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신파극의 멘트, 예상 가능한 타이밍의 감동 대사. 요즘 세대가 좀 더 날카로운 유머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그 대사들이 웃음보다는 "아, 이 타이밍에 이 대사가 나오겠구나" 하는 예측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그 유치하다고 느낀 대사들을 배우들이 어떻게든 소화해냈다는 것입니다. 유해진이 저 대사를 안 했으면 진짜 못 봤을 수도 있는데, 유해진이니까 그나마 자연스러워 보인 겁니다. 그게 오히려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실력을 증명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대사가 배우를 살린 게 아니라 배우가 대사를 살린 경우입니다.
어디서 본듯한 전개?
영화나 드라마라는 게 원래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전체 구조가 너무 익숙했습니다.
절대 안 그럴 것 같던 사람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하고 부딪힙니다. 그러다 정이 듭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따뜻한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가 닥칩니다. 절정의 위험. 긴장. 그리고 상황은 일단락됩니다. 그 와중에 또 정을 나누는 멘트가 나옵니다.
한국 영화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공식입니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들이 이러한 전개, 이러한 뼈대 위에 살을 붙인 영화들입니다. 물론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계속 해서 쓰는 거겠죠. 근데 개인적으로는 좀 진부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게 먹힌 건 단종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큰 틀에서는 이렇게 가더라도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풀 수도 있었지 않나 싶은데 조금 실망했달까요? 너무 기대가 커서 그런 걸 수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소재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배우면서 마음 한편으로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인물 중 하나가 단종입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 이 이야기를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고, 대부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 보편적인 감정 위에 이 공식을 얹었기 때문에 잭팟이 터진 거라고 저는 봅니다.
유지태의 한명회
전체적으로 좀 비판적인 톤으로 쓰고 있는데, 이건 진심으로 칭찬입니다.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이 영화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한명회라는 인물이 화면에 등장하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다른 장면에서는 좀 늘어지거나 뻔하다고 느꼈던 영화가, 유지태가 나오는 순간 팽팽해집니다. 차갑고 계산적이면서도 어딘가 여유 있는, 진짜 권력자의 냄새가 나는 연기였습니다. 세조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인물의 무게감을 유지태가 완벽하게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유해진이야 말할 것도 없이 잘했고 박지훈도 잘했지만, 유지태의 한명회가 없었으면 이 영화의 긴장감이 상당히 빠졌을 겁니다.
그리고 유지태는 확실히 악역을 할 때 그 매력이 엄청 부가되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멜로도 잘 소화활 법한 피지컬과 얼굴과 목소리임에도 개인적으로는 멜로보다는 악역으로 나올 때의 유지태가 훨씬 매력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와이프인 배우 김효진 때문에 멜로를 안 찍는 건 오해라고 하더라구요. 유퀴즈에 나와서 얘기하는 거 봤는데, 많이 미화된 거라고, 본인이 굉장히 진지하게 배역에 몰입하는 스타일이라 멜로를 하면 힘들어서 악역을 하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현재의 천만 관객 영화 조건?
코로나 이후 한국 영화 시장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OTT에 빠르게 영화가 풀리고, 넷플릭스나 티빙에서 더 재밌는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지고, 굳이 극장까지 가야 하나 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2025년에는 천만 영화가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극장에 사람을 끌어오는 게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천만, 아니 1500만을 넘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대부터 70대까지 다 같이 볼 수 있으려면 이야기가 복잡하면 안 됩니다. 반전이 어려우면 안 됩니다. 웃기고 울리면 됩니다. 익숙한 공식, 익숙한 감정, 익숙한 전개.
왕과 사는 남자가 정확히 그 전략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이 통했습니다. 제가 뻔하다고 느낀 전개가, 어쩌면 1500만 관객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가장 감동적인 전개였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영화도 시장이니까요. 제 취향과 시장의 취향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렇게 뻔한 공식으로밖에 천만 영화가 나올 수 없는 건가, 하는 생각입니다. 좀 더 날카롭고, 좀 더 새롭고, 그러면서도 대중적인 영화가 천만을 찍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은 영화인 건 맞습니다.
비판만 했으니 잘한 부분도 분명히 써야 공평합니다.
단종이라는 소재를 영화로 만든 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비극적인 인물이고, 자칫 심심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거든요. 장항준 감독 본인도 언급했듯이, 세조가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이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지, 왕위를 뺏긴 이후의 단종의 삶은 안타깝긴 해도 영화로 그려낼 만큼 긴장감 있고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을 법도 한데, 그 심심함을 각본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그리고 연출로 채웠다는 게 어찌 보면 굉장히 대단합니다.
박지훈의 단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단 잘 생겨서 눈이 가긴 했는데요. 무엇보다 어린 왕의 슬픔과 외로움을 과하지 않게 잘 표현했고, 유해진과의 호흡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전미도의 매화 역할도 나름의 역할을 잘 해냈다고 봅니다. 그리고 영월의 자연 풍경이 정말 예뻤습니다. 사극에서 CG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 자연을 배경으로 찍으니까 화면의 힘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 덕분에 단종과 엄흥도라는 역사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졌을 겁니다. 영화 한 편이 역사 교육을 하는 효과를 낸 셈입니다. 그 점에서는 이 영화의 사회적 가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 봐서 좋았고, 영화도 가만 곱씹어 보니 좋은 포인트들이 그래도 꽤 있어서 좋았습니다. 단종에 대해서도 더 궁금해졌고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왕과사는남자(왕사남)과 단종 관련된 실제 역사의 차이에 대해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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