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 실미도 줄거리, 사건배경, 실제와의 차이

 

실미도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때도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이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영화 되게 재밌다, 잘 만들었다', '연기 잘한다.', 이 정도 감상이 더 많았는데 나이가 먹어갈 수록, 가끔 OCN 등에서 나오는 실미도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상이 다르더군요. 국가가 사람을 필요에 의한 도구로 쓰고, 그 필요가 없어지면 눈도 깜빡 안 하고 가차없이 버려버린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수십 년 동안 묻혀 있었다는 것.. 아무리 범죄자 출신이라지만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요? 분명 그들은 애국심을 가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훈련에 임했을 겁니다.(물론 그 이후에 사회로의 복귀는 교화 등의 문제로 또 다른 문제지만요)

그래서 이 영화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영화 때문에 실미도 사건이라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이야기가 세상에 다시 나왔기 때문이죠. 영화 한 편이 실미도 부대에 대한 역사를 바꾸진 못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 사건을 알게 되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입니다. 200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해서 1,108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지금이야 현재 흥행 중인 왕사남부터 해서 여러 천만 영화가 나왔기에 익숙하지만, 이때 당시만 해도 천만이라는 숫자는 꿈의 숫자였습니다. 쉽게 달성 못하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고, 불가능한 숫자라 생각했죠. 한국 영화가 지금 이처럼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지기 전이기도 했으니까요. 쉬리가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실미도는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정면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습니다.


기본 정보

영화 실미도 공식포스터

저도 이건 자료를 찾아보다 처음 알았는데, 실미도가 원래 백동호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더라구요. 강우석 감독이 연출했고, 2003년 개봉했습니다. 러닝타임은 135분,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설경구가 684부대 3조장 강인찬 역을, 안성기가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 역을 맡았습니다. 허준호가 냉철한 교관 조돈일 중사 역, 정재영이 1조장 한상필 역을 맡았고, 임원희, 강성진, 강신일, 엄태웅, 김강우 등 지금 보면 쟁쟁한 배우들이 조연과 훈련병 역으로 대거 출연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이름이 덜 알려졌던 배우들이 많았는데, 지금 보면 짱짱한, 실미도 이후 하나같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습니다.

실미도는 2004년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부대 세트장을 짓는 데만 10억 원이 들었고, 장비를 옮기기 위해 대형 헬리콥터까지 동원했을 정도로 제작 규모가 당시로서는 상당했다고 하네요.

영화 실미도 스틸컷
정재영 배우가 연기한 한상필 캐릭터도 굉장히 매력있게 나옵니다. 
허준호의 조돈일 중사와 함께 실미도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실제 사건 배경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실제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1·21 사태입니다. 침투는 실패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와 중앙정보부는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 특수부대를 창설합니다. 이것이 684부대입니다. 인천 앞바다의 작은 무인도 실미도에 주둔지를 만들고, 31명의 대원을 뽑아서 지옥 같은 훈련을 시켰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북한 주석궁에 침투해서 김일성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북 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바뀌면서 작전은 무기한 보류됩니다. 대원들은 3년 넘게 섬에 갇힌 채 출격 명령만 기다렸지만, 명령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1971년 8월, 대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향했고, 버스를 탈취해 도심까지 진입했다가 자폭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살아남은 4명은 바로 사형에 처해졌고, 이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역사에서 완전히 묻혀 버렸습니다.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영화 실미도 포스터


영화는 1968년부터 시작합니다. 1·21 사태 이후, 정부는 보복 작전을 위해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모읍니다. 연좌제에 걸려 사회에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강인찬, 뒷골목을 전전하던 사내들, 살인미수로 수감 중이던 자들. 이들에게 한 군인이 접근합니다.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 사형 아니면 입대.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31명이 인천 앞바다 실미도로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가 이들 앞에 섭니다. "주석궁에 침투해서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의 임무다." 그 말 한마디로 지옥훈련이 시작됩니다. 교관 조중사의 지휘 아래 실탄 사격을 뒤에서 맞으며 뛰고,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고, 바다를 건넙니다. 낙오자는 죽입니다. 체포되면 자폭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살인병기를 만드는 훈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오합지졸이었던 훈련병들이 3개월 만에 정예 특수부대원으로 변합니다. 인민군 말투, 인민군 제식훈련, 인민군가까지 완벽하게 익힙니다. 드디어 출격 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한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지시로 중도에 소환됩니다. 남북 관계가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작전이 취소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작전은 취소되었지만 대원들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섬에 둘 수도 없습니다. 결국 상부에서는 이 대원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대원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그 나라가 자기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분노가 폭발합니다. 대원들은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섬을 탈출해 서울로 향합니다. 버스를 탈취하고 도심까지 진입하지만, 군경에 포위됩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들은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강인찬의 표정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렵습니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어떤 체념 같은 것이 얼굴에 스쳐 지나갑니다. 그 표정 하나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무거운 이유

실미도가 단순한 전쟁 액션 영화와 다른 점은, 적과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대원들의 진짜 적은 북한이 아닙니다. 자기들을 만든 나라입니다.

국가가 필요에 의해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필요가 사라지니까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조용히 없애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들은 도구였습니다. 훈련시킬 때도 도구였고, 작전이 취소된 뒤에도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한 번도 사람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관계는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와 대원들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군인 대 훈련병의 관계였던 것이 점점 변해갑니다. 지옥 같은 훈련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인간적인 유대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유대가 깊어질수록 결말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신뢰를 쌓은 사람마저 결국은 체제 앞에서 무력했으니까요.

허준호가 연기한 조중사의 변화도 주목할 만합니다. 초반에는 대원들을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냉혈한 교관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람도 흔들립니다.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인간으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영화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특히 마지막에 실미도 부대원들을 향한 사격을 멈추게 하려고 차에서 내려 뛰어가는 장면에서, 부탁받았던 씹을거리(사탕)가 떨어지는 장면은 지금 봐도 울컥하는 연출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죠.


영화와 실제 사건의 차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684부대 대원들이 살인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적 각색이고, 실제와는 다릅니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대원들 중에는 높은 보수를 준다는 정보기관원의 거짓 약속에 속아 들어간 평범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서커스 단원, 일용직 노동자 같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훈련병 8명의 유족 47명이 강우석 감독과 제작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1심과 항소심 모두에서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유족들 입장에서는 가족이 범죄자로 그려진 것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고인을 떠나보낸 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데 오해까지 받게 되었으니까요. 아직까지도 실미도는 흉악범들을 차출해 만든 부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 당시 천만 영화였다는 건 거의 온 국민이 보고 내용을 공유하고 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파급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백 수천번 티비에서 방영도 했을 것이고요.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입니다. 실미도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소설을 원작으로 재구성한 극영화라는 점을 알고 보면 좋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이유는, 수십 년 동안 묻혀 있던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개봉한 뒤 실미도 사건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북파부대 문제 전반이 사회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당시 극장에서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평소에 영화관에 잘 오지 않던 40~50대 중년 남성들이 객석을 채웠고, 숨죽인 채 몰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험악하고 힘들었던 군 복무를 경험한 세대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을 겁니다.

20년이 넘은 지금 다시 봐도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하다 느껴집니다. CG나 촬영 기술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투박한 부분이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그런 걸 전부 덮어버립니다. 설경구의 눈빛, 안성기의 무게감, 허준호의 카리스마와 갈등. 이 세 사람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20년이 지나도 유효합니다. 윤석열이 선포한 비상계엄을 겪은 현재에 더욱 그렇습니다. 국가는 개인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을, 국가가 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단순히 액션과 연기만 보면 재밌게도 볼 수 있겠지만 깊이 생각하며 보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은 봐야 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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